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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언론보도-한국일보] “전등 끄고 오는 데만 80분... 그래도 홀로서기 포기 안 해요”
- 작성일2018/04/20 14:02
- 조회 2,276
- ‘왕복 80분’이 걸린다는 뇌성마비 장애인의 말을 듣고, 장애인 지원 사업을 펼쳐온 ‘따뜻한동행’이 사업을 계획
- 장애인 자립생활이 가능한 공간 개조 지원
# 중증 장애인 ‘脫시설’ 도전
문턱 없애는 등 세세한 설비 필요
300만원 들여 IoT 기능 설치하면
말로 보일러ㆍ전등 작동 가능해져
문턱을 없애 휠체어를 집안에서도 이용할 수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저작권 한국일보]지난 10일 뇌병변 1급 장애인 박남식씨가 서울 암사동의 한 주택에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화장실로 들어가고 있다.
“밤에 전등을 끄려면 팔꿈치로 40분을 기어가서 끄고, 다시 40분을 기어와야 해요.” 언어장애가 있어 힘든 발음으로 그는 말했다.
지난 해 여름, 독립생활 중 무엇이 가장 힘든지를 묻는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 이광재 상임이사(사회복지사)의 질문에 한 뇌성마비 장애인은 “불 끄기”라 말하며 이렇게 답했다. 발가락으로 전동휠체어를 운전해야 하는 중증장애에도 씩씩하게 자립 생활을하는 그는 활동보조인이 퇴근하는 밤이 되면, 전등 스위치를 누르기 위해 사투를 벌여온 것이다. 전등 끄기의 어려움은 사물인터넷(IoT) 기술로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소득이 낮은 장애인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주택 내ㆍ외부의 문턱을 없애고, 활동보조인을 늘리고, 편리하게 전등이나 보일러를 작동하는 IoT 기술을 장애인에게 보급한다면 이들도 동네에서 평범하게 이웃들과 어울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대신 장애인들을 분리해 시설에 사실상 가둬두는 방식을 선호해 왔다. 주요 장애인 단체들은 장애인의 날인 20일을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부른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답답한 시설을 벗어나 최소한의 자유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부모에게 부담을 주지 않은 떳떳한 자식이 되기 위해 독립 생활을 하거나 계획 중인 중증장애인들을 만나봤다. 이른바 ‘탈(脫)시설 투쟁’에 나선 이들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문턱을 거의 없애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는 현관.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어머니, 스스로 살아볼게요”
뇌병변 장애 1급 이동진(27)씨는 2015년 3월 15일을 정확히 기억한다. 부모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언제까지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의지할 수 없다. 서울에서 혼자 일하고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오른쪽 몸의 마비(편마비)가 있어 걷기 힘든 아들의 상태 때문에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했다. 동진씨는 “장애를 가졌다고 너무 걱정을 하면, 내 능력을 깨치지 못한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렇게 경기도의 집을 떠나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LH임대주택에 입주했다.
다세대주택 지하 1층 집에서 홀로 생활하는 그는 계단과 문턱 때문에 전동휠체어를 1층에 둬야 한다. 즉 집까지 걸어내려 가야하는 것이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요청해 잡고 내려갈 수 있는 봉을 설치했다. 동진씨는 집안에서 이동할 때 수없이 넘어져 살갗이 까진다고 했다. 집안이 좁고 물건들이 빼곡할 경우 넘어졌을 때 다칠 위험이 더 크다. 하지만 활동보조인이 없을 때는 천천히 밥 한끼를 차려먹고, 힘이 없는 다리를 지탱해 설거지도 한다. 그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해뜨는양지’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정부에서 지급하는 장애인 수급비 월 28만원을 보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저소득층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푸드마켓에 가서 식재료 등은 구할 수 있다. 동진씨는 “다른 장애인들에게 자립경험을 알려주고, 나보다 더 중증인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소망을 실천해 가고 있다.
박남식씨가 휠체어레이싱을 연습하는 모습. 박남식씨 제공
역시 뇌병변 장애 1급인 박남식(21)씨는 아직 시설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식씨도 탈(脫)시설과 자립을 준비하고 있다. 일정기간 자립생활을 해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험홈에서 일주일 가량 생활한 적이 있다. 남식씨는 “체험홈에서 생활할 때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늦은 시간 밖에 나갈 수 있던 것,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게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립연습을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장애인체육 분야의 육상종목이라고 할 수 있는 휠체어레이싱에도 재능이 있어, 선수로 전국체전에 나가는 게 남식씨의 꿈이다.
[저작권 한국일보]뇌병변 1급 장애인 이동진(왼쪽)씨와 박남식씨가 인공지능 스피커를 들어 보이고 있다. 스피커에 말을 해서 전등이나
보일러, 가스밸브를 작동할 수 있어 집안에서 힘들게 이동하며 수없이 넘어지지 않아도 된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전등 끄기에 ‘왕복 80분’이 안 걸리려면
장애인들이 사는 집에 IoT 기능을 설치해주는 민간 사업이 지난해 시작됐다. 전등 끄기에 ‘왕복 80분’이 걸린다는 뇌성마비 장애인의 말을 듣고, 장애인 지원 사업을 펼쳐온 ‘따뜻한동행’이 사업을 계획했다. 지난해 하반기 장애인자립생활 체험홈 운영자들의 신청을 받아 10곳을 장애인이
살기 편하게 개조해 주면서, IoT 기능을 적용했다. 설치는 한 통신사의 지원을 받았다.
이중 한 곳인 서울 암사동의 체험홈에 동진씨와 남식씨가 지난 9일 함께 입주했다. ‘해뜨는양지’가 일부 금액을 협약을 통해 강동구청으로부터 지원받아 매입했고, ‘따뜻한동행’이 개조해준 곳이다. 동진씨는 1박2일을, 남식씨는 일주일 가량 생활해 봤다. “팅커벨, 전등을 켜줘”라고 말하자, 불이 켜진다. 보일러, 가스밸브, 후드 등도 앉아서 말로 작동시킬 수 있다. 가스밸브 등은 어렵게 손으로 돌리지 않고 터치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게 돼 있다. 남식씨는 “요리를 좋아하는데 불 사용이 항상 걱정이었다”라며 “스마트 가스밸브 덕분에 안심하고 사용했다”고 기뻐했다. 동진씨와 남식씨가 함께 장을 봐서 불고기,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 동진씨도 “이동하지 않고 집안에서 스위치ㆍ보일러 등을 조정할 수 있어 좋았다”며 “집에 설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IoT 기능이 있으면 동진씨는 방안에서 무리하게 걷다 넘어지고 깨지는 일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스마트홈 기능을 설치하려면 200만~300만원가량이 든다. 이후 3년 통신비만 해도 100만원에 달한다. 등록장애인은 일부 통신비 감면 혜택(30~50%가량)이 있지만, 빈곤 비율이 높은 장애인들에게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동진씨는 “장애인들에게 무료로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장애인들에게는 있으면 편하고 없어도 되는 기능이지만, 자립 장애인에게는 생존과 직결되는 꼭 필요한 기능이 IoT와 인공지능(AI)이다.
물론 기술의 발전이 장애인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보니, 극복해야 할 문제점도 있다. 동진씨는 “언어장애가 있는 장애인은 명령어를 제시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걱정했다. 남식씨는 “발음이 부정확할 경우 알아듣지 못하더라”고 말했다. 동진씨는 언어장애가 거의 없지만, 남식씨는 언어장애가 있는데 또박또박 말하면 ‘팅커벨’이 그래도 잘 알아듣는 편이다.
[저작권 한국일보]중증장애인 박남식씨가 가스조절 버튼을 누르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로 음성으로 제어가 가능하고, 밸브가 아닌
버튼식이어서 사용이 편리하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장애인들을 위한 자립 공간은
암사동 주택은 동진씨의 집과 달리 휠체어가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 안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 문턱을 모두 없앴기 때문이다. 화장실 문은 쉽게 열고 닫을 수 있게 미닫이 문으로도 개조했다.
그럼에도 장애인들이 실제 생활해보니 개선해야 할 점이 지적됐다. 동진씨는 “화장실 바닥이 까칠해서 살이 쓸리기 때문에 매트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가스레인지가 밸브 대신 버튼 식이었으면 더 편할 것 같다. 또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높이도 잘 맞지 않았다. 이들에겐 너무 높았다.
따뜻한동행 김태정 과장(사회복지사)은 “개수대 높낮이를 조절하는 제품이 있지만 내구성이 약하고 가격이 비싸다”며 “현재로서는 싱크대 아랫부분을 뚫어서 아예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휠체어에)앉아서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장애인을 위한 공간은 장애 특성별로 세심한 디자인이 필요하다. 이광재 이사는 “종일 누워있어야 하는 장애인의 경우에는 TV를 작동하기 쉽게 하는 기능을 지원하는 식으로 접근했다”고 말했다.
장애인에 적합한 주거공간을 연구하는 권오정 건국대 건축학과 교수는 “장애인들이 안정되게 지속거주가 가능한 주거대안이 거의 없다”며 “장애인을 위한 소규모집합 주택, 즉 공유형 다세대 주택을 만들어서 장애인을 위한 공간뿐 아니라 지역민이 어울릴 수 있는 모델을 구상해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광재 이사는 “미국의 경우는 법원 판결로 대규모 장애인 시설에 폐쇄명령을 내리고 주정부에서 주거환경을제공하도록 했다”며 “하지만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삶을 살아보지 않았고, 때문에 장애인 스스로도 독립 생활을 두려워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의지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는 그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며 “장애인의 완전한 통합과 참여가 정부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지난 3월 정부는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지원센터를 현재 62개소에서 2022년 90개소로 늘리고 ‘탈시설지원센터’를 설치하고, 공공임대주택과 자립정착금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김태훈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정책실장은 “지난 13년 동안 자립생활지원센터당 지원금이 한해 1억5,000만원으로 동결됐고 그나마 지원금 중 지방자치단체 부담이 더 크다”며 “현 정부 들어 정책 전환이 이뤄지고 있지만 발표 내용도 세부계획이 미흡하다”고 비판했다. 김 실장은 “형제복지원이나 대구희망원 사건에서 보듯 시설 중심의 장애인 정책은 인권유린이 뒤따른다”며 “장애인 탈시설 투쟁은 2000년대 초반부터 장애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시작됐고 그것이 자립생활센터가 되고 서울시의 지원이 뒤따르고, 이후 정부가 법제화하면서 뒤따라온 형국”이라며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원본링크 - [한국일보] http://www.hankookilbo.com/v/9edef90107f64a41b86675fd05ab67b7